Conversion

전향

합리성에 대한 위협은 주로 패러다임의 혁명적 전이라는 개념에서 온다. 그는 그것을 종교적 전향(conversion), 형태 전환(gestalt-switch) 현상에 비유한다. 여러분이 종이 위에 사면체의 투시적인 모습을 그리면 때로 한 방식으로 접하는 모습, 때로는 다른 방식으로 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때로는 토끼로 보일 수 있고 때로는 오리로 보일 수 있는 모습을 비트겐슈타인은 사용했다. 종교적 전향은 유사한 현상의 중대한 변형이라고 이야기되는데, 이는 어떤 이가 삶에 관해 느끼는 방식에서 급진적인 변화를 초래한다.

형태 전환은 아무런 추론도 개입시키지 않는다. 이유 있는 종교적 전향이 존재할 수 있고, 이는 아마도 개신교보다는 가톨릭 전통에서 더 강조될 것이다. 쿤은 이 대신에 '거듭난다'는 견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한 파스칼을 상기할 수 있었을 텐데, 파스칼은 신자가 되는 좋은 길은 신자 사이에서 사는 것이며, 이는 아무 생각 없이 의례가 참이 될 때까지 의례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믿음의 비합리적인 변화가 덜 합당한 학설에서 더 합당한 학설로의 전환이 아닐 수도 있음을 그러한 반성이 보여주지는 않는다. 쿤 스스로 우리에게 형태를 전환하도록 고무시키는데, 이는 합리성과 논리라는 오래된 규준에 종속된 것으로서 과학의 발전을 바라보는 일을 중단시키려 한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는 다음의 새로운 구도를 제안한다. 패러다임 전이 이후에 새로운 분야 매트릭스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선배들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된다'.

공약 불가능성

다른 세상에서 살기는 중요한 귀결을 함축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옛 패러다임의 장점을 그 계승자의 그것과 비교하고 싶어할 수 있다. 혁명은 오직 새로운 이론이 오래된 이론보다 알려진 사실과 더 잘 맞을 때에만 합당했다. 쿤은 그 대신에 여러분이 새로운 이론의 언어로 오래된 이론의 관념을 표현조차 할 수 없을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 새로운 이론은 새로운 언어다. 둘을 표현하고 이어 둘을 비교하게 해줄 이론 중립적(theory-neutral) 언어를 찾아내는 아무런 방도가 글자 그대로 없다.

자기만족적으로, 우리는 계승하는 이론이 그것의 날개 아래 앞서 있던 이론의 발견을 취할 것이라고 가정하곤 한다. 쿤의 시각에서, 그러한 발견을 표현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수가 있다. 이따금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지식의 성장에 관한 우리의 오랜 구도는 지식의 누적에 관한 구도였다. 쿤은 어떤 하나의 정상 과학은 누적적일 수가 있겠지만, 과학은 일반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전형적으로 혁명 이후에 몇몇 화학, 생물학 또는 그 무엇의 상당한 큰 덩어리는 잊혀지게 될 것이고, 포기된 세계관을 고통스럽게 습득하는 역사가에게만 접근 가능한 것이 된다. 비판자는 물론 이것이 얼마나 '전형적'이냐에 대해서 의견일치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조금은 정당하게 그들은 더 전형적인 경우는 이를테면 고전적 상대성을 자신의 날개 아래 취하는 양자 상대성 이론의 경우라고 주장할 것이다.

객관성

쿤은 그의 연구(와 다른 사람의 연구)가 합리성의 위기를 산출해냈던 그 방식에 의해서 역풍을 맞았다. 그후 그는 자신이 결코 과학 이론의 통상적 장점을 부정하려 한 바 없다고 썼다. 즉 이론은 정확해야, 다시 말해 존재하는 실험적 자료와 대체로 들어맞아야 한다. 이론은 내적으로 일관되어야 하며 받아들여진 그밖의 이론과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이론은 영역이 넓어야 하며 풍부한 귀결이 있어야 한다. 이론은 다산적이어야 하며, 새로운 사건, 새로운 기법, 새로운 관계를 밝혀내야 한다. 한 정상 과학 안에서 똑같은 개념을 사용하면서 경쟁하는 가설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주는 결정적 실험이 드물 수도 있겠지만, 결정적 실험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구조>에 나타난 쿤에 대한 대중화된 이미지와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계속 나아가서 두 가지의 근본적인 요점을 만들어낸다. 첫째, 그의 다섯 가지 가치와 이와 똑같은 종류의 여타 사항은 경쟁하는 이론들 사이에서 결정적인 선택을 하는 데에 결코 충분치가 않다. 판단의 여타 성질들이 작용하고, 이러한 성질들에 대해서는 원리적으로 어떠한 형식적 알고리듬도 존재할 수가 있다. 둘째는 다음과 같다.

내가 주장하듯 서로 다른 이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상이한 언어의 원어민과 같다. (...) 나는 서로 다른 이론을 지지하는 이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중요한 한계가 존재한다고 단순히 주장할 뿐이다. (...) 그렇지만 그들의 의사소통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이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항상 쉬운 것은 아니더라도 서로 각각의 이론 안에서 실천하는 이들에게 쓸모가 있는 구체적인 기술적 결과를 나타내 보일 수 있다. 

쿤이 계속 이야기하기로, 여러분이 어떤 이론의 주주가 될 때, 여러분은 '그 언어를 마치 원어민처럼 말하기 시작한다. 선택과 같은 어떤 과정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결국에는 원어민처럼 그 언어를 말하게 된다. 여러분은 정신 속에 두 가지 이론이 없으며 그들을 사안별로 비교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그들이 너무나도 다르다. 여러분은 점진적으로 전향하고, 그것은 새로운 언어 공동체 속으로 이사해 들어감으로써 그 자체를 보여준다.

아나키즘적 합리주의

내가 생각하기에, 쿤은 원래 이성을 전혀 문제 삼으려 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시대 사람인 파이어아벤트는 다르다. 그의 급진적인 관념은 종종 쿤의 관념과 중첩되지만, 그는 독단적 합리성의 오랜 적수다. 그는 자신을 아나키스트라 불러왔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종종 사람을 해치기 때문에, 그는 다다이스트라는 이름을 선호한다. 합리성의 어떠한 규준도 있게 하지 말고, 훌륭한 이성의 어떤 특권화된 집합도 있게 하지 말며, 정신을 묶는 어떤 선호된 과학 또는 패러다임도 있게 하지 말자. 이러한 도덕적 금지는 부분적으로 인간 본성에 관한 한 개념에서 흘러나온다. 합리주의자는 인간 정신의 자유로운 기풍을 체계적으로 구속하려 한다. 이성이라 불릴 가치가 있는 그 어떤 것도 그 안에서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여러 가지 합리성들, 여러 스타일의 이성, 또한 여러 가지의 훌륭한 삶의 양식이 존재한다. 반면 파이어아벤트는 어떠한 스타일의 이성의 사용도 배제하지 않으며, 확실히 자신의 이성의 스타일을 갖고 있다. 

반작용

파이어아벤트의 일부 반론과 달리, 쿤의 책에서 주된 요소들은 과학적 합리성을 명시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과학에 관한 다른 구도를 제공한다. 과학은 모든 점에서 도전을 받아왔다. 쿤이 제시한 역사는 문제 제기를 당했고, 일반화는 의혹을 받았으며, 언어와 공약 불가능ㄴ성에 대한 그의 견해는 사납게 비판받았다. 어떤 철학자는 방어적 자세를 취하면서, 오래된 관념을 보존하려고 했다. 다른 철학자는 새로운 관념으로 공격하면서, 쿤보다 더 나아지기를 희망했다. 임레 라카토슈가 그런 이 가운데 하나다. 그의 연구는 뒤에 나오는 8장에서 논의된다. 라카토슈는 자신이 쿤에 직면해 포퍼를 수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 쿤의 '군중 심리학'에서 자유로운 과학적 합리성을 원했다. 그는 흥미를 돋우는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을 발명했는데, 이는 쿤을 논박하기보다는 과학에 대한 대안적, 합리주의적 시각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좀더 토의하자면, 합리성에 대한 나 자신의 태도는 파이어아벤트의 태도와 아주 많이 닮았다. 뒤이어 나오는 내용은 과학적 실재론에 관한 것이며, 합리성에 관한 게 아니다. 합리성의 현재적 상태에 대한 최선의 짧은 요약은 래리 라우든에서 나온다.

우리는 현존하는 역사적 증거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가 있을 것이다. (1) 이론 전환은 일반적으로 비점증적인데, 즉 앞서 있던 이론들의 논리적 내용 또는 경험적 내용은 (혹은 입증된 귀결조차도) 그 이론들이 새로운 이론에 의해서 자리에서 밀려났을 때 전체적으로 보존되지는 않는다. (2) 이론은 단순히 그것이 변칙 현상을 지닌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거부되지는 않으며, 단순히 그것이 경험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수용되지도 않는다. (3) 과학 이론의 변화와 과학 이론에 관한 논쟁은 종종 경험적 지지에 관한 질문보다는 개념적 쟁점에 달려 있다. (4) 과학자가 이론을 평가하는 데에 활용하는 과학적 합리성의 특수하고 '국소적(local)' 원리는 항구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과학의 경과를 통해 의미심장하게 변화되었다. (5) 과학자가 이론을 향해 취하는 인지적 입지의 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이는 수용하기, 거부하기, 추구하기, 즐기기 등을 포함한다. 앞쪽의 두 가지만을 토의하는 합리성에 관한 어떤 이론은 과학자들이 직면하는 대부분의 상황을 다룰 수가 없게 될 것이다. (7) '근사적 진실approximate truth'의 의미에 대해서 의미론적 수준과 인식론적 수준에서 악명 높은 난점들이 제기되면, 진화는 과학의 중심적 목표에서 진리 가능성을 향하는 것이라고 보는 과학적 진보에 대한 성격묘사는 그럴듯하지 못하다. (8) 경쟁하는 이론의 공존은 예외라기보다는 규칙이다. 그러므로 이론 평가는 일차적으로 비교하는 일이다. 

라우든은 과학적 합리성이 문제를 푸는 과학의 힘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론 T는 T가 T*보다 더 많은 문제를 풀 때 T*보다 선호되어야 한다. 우리는 T가 T*보다 진리에 더 가까이 있느냐를 염려해서는 안 된다(논점 7).  이론은 문제를 푸는 그것의 능력에 의해서만 평가될 수 있을 뿐이다(논점 8). 실험적 사실과의 맞물림뿐 아니라 개념적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도 고려해야 한다(논점 3). 현재적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관념에 기초하는 연구를 추구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연구는 전진해 가는 문제풀이에서 그것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논점 2).

우리가 라우든의 모든 논점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문제풀이 능력을 비교할 수 있다는 데 대한 의혹을 나는 라우든에 대한 비판자들과 공유한다. 나에게 라우든의 가장 중요한 관찰은 논점5다. 이론 수용하기와 거부하기는 오히려 과학의 작은 부분이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좀처럼 그것을 하지 않는다. 나는 라우든의 결론과 반대로 결론을 내린다. 합리성은 과학에서 별로 중요치 않다. 언어철학자 길버트 라일은 우리에게 작동하는 것은 단어 '합리적'이 아니라 오히려 단어 '비합리적'이라고 오래 전에 주목했다. 나는 내 현명한 아주머니 퍼트리셔에 대해서 그녀가 합리적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식이 있고 현명하며, 상상력이 풍부하고, 지각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바보 같은 아저씨 패트릭에 대해서 때로 비합리적이라고 (또한 게으르고 위험하며, 뒤죽박죽이고,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합리적 동물이라고 가르쳤고, 이는 인간이 사유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우리는 '합리적'이 평가적 단어임을 생각하지 않고도 이에 동의할 수 있다. 우리의 현재적 언어 속에서 오직 '비합리적'만이 평가적이며, 그것은 우둔함, 믿을 수 없음, 변덕스러움, 불확실함, 자기 인식의 결여 등 그밖에도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과학철학자들이 연구한 '합리성'은 파이어아벤트에게 그런 것처럼 내게도 별다른 매력이 없다. 실재는 더 재미있는데, '실재'라는 단어가 어떤 더 나은 단어가 아님에도 말이다. 실재란... 무슨 개념인가.

그건 그렇고, 우리가 어떻게 역사주의자가 되어왔는지를 보라. 라우든은 '현존하는 역사적 증걸부터' 그의 결론을 이끌어낸다. 과학철학이라는 담론은 쿤이 썼던 때 이래로 변형되어 왔다. 니체가 진술했듯이, 우리가 과학을 탈역사화함으로써 과학에 대한 우리의 존중을 보여주는 일이 더 이상 없게 될 것이다.

합리성과 과학적 실재론

과학철학의 표준적 도입적 주제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이에 대해서는 뒤에 나오는 내용에서 더 이상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성과 합리성은 그다지 분리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이 도입에서 언급한 문제를 취급할 때, 강조는 항상 실재론에 있다. 5장은 공약 불가능성에 대해서 다루지만, 그것은 공약 불가능성이 비실재론의 배종을 포함하기 때문일 것이다. 8장은 라카토슈에 대해서 다룬다. 때때로 그는 합리성의 챔피언으로 여겨지지만, 내 생각에 진리 대응설 없이도 실재론자가 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가 8장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밖의 철학자들은 이성과 실재를 모아서 더 가깝게 한다. 예를 들어 라우든은 실재론을 주장하는 이론을 공격하는 합리주의자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실재론을 합리성에 관한 이론의 기초로 삼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며, 라우든은 이것이 가공할 실수라고 주장한다. 결국 나는 일종의 실재론을 들고 나올 것이지만, 이는 라우든에 반대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실재론을 '합리성'의 토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힐러리 퍼트넘은 '진리와 합리성의 관념 간에는 극도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로 주장하면서 1982년에 출간한 저서 <이성, 진리, 역사>를 시작한다. (진리는 그 아래서 과학적 실재론이 논의될 하나의 표제어다.) 그는 계속하여, '더 거칠게 말해서, 사실이 무엇이냐에 대한 유일한 기준은 무엇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냐다(p.x)'라고 이야기한다. 퍼트넘이 옳든 그르든, 니체는 다시 한번 정당성을 입증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영어로 쓰인 철학책들은 한때 A. J. 에이어가 쓴 1936년 책 <언어, 진리, 논리>와 같은 제목이었다. 1982년에 우리는 <이성, 진리,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제 관계하려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나는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서 역사적 사례를 이용하게 될 것이고, 지식 자체가 역사적으로 진화해 온 존재자임을 가정하게 될 것이다. 상당히 많은 것이 관념의 역사 또는 지성사의 일부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사고하는 바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는 것에 대한 역사처럼 더 단순하고 더 고풍스런 역사 개념이 존재한다. 그것은 관념의 역사는 아니지만 (조건 없이) 역사다. 나는 라우든과 퍼트넘보다 더 날카롭게 이성과 실재를 분리하는데, 이는 실재란 우리가 그것에 관해 생각하는 바보다는 세계 안에서 우리가 하는 바와 더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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