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스트로스의 말

샤    이른바 원시적이라고 말해지는 사회의 예술과 현대 예술, 그러니까 현대적인 예술이 아니라 현대 시대 예술의 차이를 인류학자는 어떻게 보나요?

레   우선 다소 모호한 '현대'라는 개념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어요. 인류학자라면 5세기 그리스 예술이나 이탈리아 회화, 특히 시에나 학파의 미술에 대해서는 완전히 편안함을 느끼고 익숙하게 생각하지요. 그건 좀 낯선 인상이 들어도 금세 내 발 아래 들어오기 시작하는 영역입니다. 각각의 역사적 차원에서도 이런 것은 상대적으로 '현대적' 형태이지요. 이런 것과 예술 혹은 원시예술과의 비교를 시도해야 합니다. 
그 차이는 두 가지 체계에 따라 생깁니다. 하나는 우리가 예술품 생산의 개별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점점 더 구상적 또는 재현적이라고 부를 만한 성격의 것입니다. 여기서 명확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제가 예술 생산의 개별화라고 할 때 그것은 개인, 즉 창작자인 예술가의 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시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원시적이라고 부르는 사회에서 예술가는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조각품에 대한 최근의 연구 작업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어요. 이 원시사회의 예술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둥글게 모여 앉아 있는 무리에서 간혹 제법 멀리 떨어져 앉아 있는 축이라도 말이에요. 당시 관객은 가면 또는 조각 제작자의 고유한 스타일을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현대 예술을 보면 창작자가 아니라 고객의 개별화가 늘어났다는 게 문제가 됩니다. 예술가에게 기대하는 것이 점점 없어져요. 오히려 미의 기준에 들어맞는 어떤 오브제의 스타일을 예술가에게 주문하는 격이지요. 현대사회 집단에서는 예술가보다 아마추어, 즉 예술 애호가에 대한 기대가 더 많아졌습니다. 우리 사회 혹은 우리 아마추어 집단을 매우 다른 사회와 비교하면서 이런 용어를 쓰니 좀 어색하겠지만 말입니다. 

샤   우리 시대에 예술이 아마추어들의 전유물처럼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집단 내부에 단절이 있어요. 우리 집단 내의 일부는 예술 작품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지요. 아니면 수준이 낮은 것만 좋아하고요. 여기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있어요. 우리 사회에서 예술 작품은 아주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접근 가능하지 않아요. 가끔 이런 현상을 원시사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원시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예술 작품에 사적인 접근을 할 수가 있습니까?

레    그건 여러 경우가 있어요. 원시사회에서도 제가 조금 전에 언급했던 사회경제적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비싸도 그것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 또는 부가 있는 집단을 위해 예술 작품을 만들지요. 이런저런 예술가의 생산물을 보유하고 있으면 큰 위엄과 영예가 생기고요. 이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꽤 특별한 겁니다. 방금 사회적 서열 문제를 제기하신 건 옳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난번에 역사의 진보와 위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나왔지만 또 나오는 군요. 우리는 역사가 어떤 사회 내부에서 하나의 범주이며 양식이라고 했는데, 역사에 따라서 서열화 사회가 포착이 되는 것이지 모든 인간 집단 가운데 당연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환경은 아니니까요. 이런 비슷한 개념을 또 보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에 무조건 수긍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것을 불쑥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우호해서 거기 이르는 게 훨씬 설득력 있으니까요. 자, 지금까지 제가 두 성격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것을 다시 말해보겠습니다. 예술품은 예술가의 관점보다 고객의 관점에서 개별화됩니다. 그들은 작품이 점점 구상적, 즉 구체적인 재현성을 갖는 것을 선호하지요. 원시사회의 예술 집단에서는 기술이 너무 초보적이어서 예술가가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의 수단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또 원료나 질료의 저항성도 극복해야 하고요. 그런 어려움이 있다 보니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의식적으로는 원하지 않아도 실은 더 자주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원하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예술가가 예술품이라기보다 단순한 복제품을 만들게 되는 이유가 그런 거지요. 자기가 만든 모델을 고스란히 재생산하거나 그걸 거부할 수밖에 없어요. 따라서 재생산된 작품이 의미를 띠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술은 재현이라기보다 그저 신호 체계로 나타나게 되지요. 자세히 보면 여기서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예술품의 개별화, 그리고 작품의 의미 기능 약화와 상실. 반면 이 두 가지는 기능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언어가 있기 위해서는 거기에 우선 집단이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건 당연합니다. 언어라는 것은......

샤   구성되는 거지요.

레    그렇습니다. 언어는 집단 현상이고 집단 때문에 설정되는 것이고 집단에 의해서만 존재합니다. 언어는 변경되지 않으니까요. 의지에 따라 전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사회 안에 각기 특수한 언어를 가지고 있는 작은 예배당을 너무 많이 만들면, 우리는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혹은 몇 해 전부터 우리가 예술 분야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듯, 우리가 언어에도 끊임없이 전복이나 혁명을 도입하게 되면 점점 소통이 어려울 겁니다. 따라서 언어를 말하는 자는 하나의 큰 현상을 말하는 것이고 한 집단 전체의 관심을 끄는 것이며, 특히 꽤 상대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안정성 있는 하나의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했던 두 차이는 사실 하나인, 같은 현실의 두 가지 면입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개별화라는 요소가 예술품 안에 도입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필요해서도 그렇고, 어쩔 수 없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작품은 의미 작용하는 기능을 잃어버리다가 종국에는 점점 큰 모델과 어림잡아 비슷해지면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의미를 띠는 것이 아니라 흉내만 내게 되지요. 
그러면 방금 말씀하신 사회학적 성찰을 해봅시다. 기호 체계가 다르긴 하지만 우리는 예술과 언어의 관계를 도입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이 문제를 문자 표기와 관련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떤 사회적 현상에 문자 출현이 늘 그리고 도처에서 발생했다는 것에는 우리가 의견의 일치를 보았지요. 나는 문자 표기와 동시에 일어나는 사회 현실이 바로 카스트 혹은 계급 체제와 부합하는 분열.분리의 출현이라고 봅니다. 이미 말했지만 문자는 그것의 초기에 인간이 다른 인간을 노예화하는 수단이었어요. 물건을 사유화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술품의 변형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닐 겁니다. 방금 제가 암시한 것은 문자 사회 안에서 일어난 것이고, 그게 르네상스 때의 새로운 현상이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그 시대에 인쇄술의 발명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일어난 건 확실합니다. 사회생활에서 문자의 역할이 더욱 커지는 중요한 변화였지요. 어쨌든 두 사회, 즉 그리스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계급과 재산의 분리가 특히나 두드러졌습니다. 결국 두 사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인데, 여기서 예술은 내밀한 쾌락의 도구 혹은 수단을 찾는 소수자들의 분야가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원시적이라고 부르는 사회의 예술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원시사회에서는 예술이 집단 단위로 기능하는 소통 체계에 가까웠지요. 

댓글

가장 많이 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