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표절

묘사적이고 설명적인, 순환적 시간개념은 창작을 부추기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자연의 흐름처럼, 동일한 형태와 테마가 문학과 예술사에서 정기적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면서 미래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욱 빨리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서 미래의 발명에 가담할 수 있을 미학적 요소들을 과거로 찾아 나설 것을 부추기는 것이다. 118


문학에 대한 이 표상-인과관계의 차원이 지워지고 우연의 연속이 부각되는-은 한 저자에서 다른 저자로의 이행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하는 걸 가로막지는 않는다. 문학이 단계를 거쳐 이상적인 목표를 향해 진보해 나간다는 헤겔식의 거대한 움직임이 발레리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다른 움직임들이 전적으로 가능하더라도, 위대한 작가의 갑작스런 출현은 어떤 형태의 논리를 따르는데, 그 논리란 단절의 논리다. 위대한 작가는 자신을 넘어서는 연속성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조합이 제공하는 가능성들을 직관적으로 의식하고서 탐험되지 않은 잠재성들 가운데 일부를 탐험함으로써 다른 무언가를 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위대한 작가의 출현에 대한 놀라운 예는 보들레르가 보여준다. "보들레르의 상황"이라는 글에서 발레리는 어떻게 보들레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찾는지 잘 보여준다. 그런데 그 시대에 존재하는 것이란 바로 낭만주의다. 

1840년에 글 쓰는 나이에 이른 한 청년의 상황에 우리를 놓아보자. 그는 그의 본능이 무너뜨리라고 강력히 요구하는 이들로부터 자양분을 얻는다. 그들이 선동하고 자양분을 제공한, 그리고 그들의 영광이 자극하고 그들의 작품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 그의 문학적 삶은 필연적으로 그 사람들을 부정하고 전복하고 대체하는 데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에게는 그들이 명성의 공간을 모조리 채우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이는 그에게 형태의 세계를 금지하고, 다른 이는 감정의 세계를 금지하며, 또 어떤 이는 정취를, 또 다른 이는 깊이를 금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상황", <미학 담론>, 폴 발레리, 전집 1권)

이렇듯 새로움의 추구는 이미 자리 잡고 있는 것과 역행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보들레르의 문제는 이렇게 제기될 수 있었다-이럴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시인이어야 하지만 라마르틴도, 위고도, 뮈세도 아니어야 한다." 이런 의도가 의식적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보들레르 내면에 필연적으로 있었다는 얘기다-이 의도는 본질적으로 보들레르이기조차 하다. 그것은 그의 존재 이유였다. 자존심의 영역이기도 한 창작의 영역에서 두각을 필요성은 존재 자체와 구분될 수 없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의 서문 초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름난 시인들은 시 영역에서 가장 만개한 지역들을 오래 전부터 공유해 왔다. 따라서 나는 다른 것을 할 것이다..."

낭만주의자들 가운데 보들레르가 대립해서 자신을 구축해야 했던 작가를 가장 잘 구현하는 것은 위고다.

약간의 악의와 적절한 재간을 발휘한다면 빅토르 위고의 시를 보들레르의 시와 근접시켜 보는 것도 매우 유혹적인 일일 것이다. 보들레르의 시가 위고의 시를 정확하게 보완하는 것임을 드러낼 목적으로 말이다. 굳이 그럴 생각은 없다. 빅토르 위고가 하지 않은 것을 보들레르가 추구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어떤 면에서 위대한 작가는 언어의 전체 조합에 다가가는 특혜를 누리는 자다. 창작자를 기다리며 성취되지 못한 채 그곳에 남아 있는 가능성들을 직감하고서 위대한 작가는 앞선 것과의 철저한 단절을 실행하고 새로운 길들을, 아니 전체적 비전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새롭게 보일 길들을 고안해낼 능력을 가진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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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언어 속에 가능성들의 조합이 들어있다는 생각에 부합한다. 진정한 발명은 맹목적이며, 존재하는 것과의 단절은 낯선 것을 향한 길을 열어준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무언가에 맞서서 자신을 규정하면서 보들레르는 나중에 봤을 때 필연적이었다고 밝혀질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연히 작업의 장을 열게 되는데, 그 장은 열린 것만큼이나 재빨리 닫힐 수 있다. 발레리가 잘 보여주듯이 보들레르를 구하는 일은 계승자들을 찾는 것이다. 
    아직 되어가는 중인 작가는 발견해야 할 새로움에 대한 명확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그 새로움이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연적 창작이 저자가 단절하고 싶어 하는 과거의 작가들과 관련해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굴을 만들려고 애쓰는 동시에 영감을 받으려고 하는 미래의 작가들과 관련해서도 이루어진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내가 '미래 유령'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해 발레리는 그들이 보들레르의 텍스트 속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들이 보들레르에게,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작가들이 서로를 가르치는 쌍방 표절을 통해 앞선 작가들만큼이나 미래를 만들어내게 해준다고 제시한다. 130

    이렇듯 우리는 발레리와 더불어 미래 유령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맺어지는지 보고, 우리보다 앞선 작가들과 우리를 잇는, 한결 더 잘 알려진 관계 모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두 경우에서 관계는 두 가지 방향으로 형성된다. 우리보다 앞선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그들로부터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그들에게 존재를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안긴 추가적인 삶을 통해 아직 존재할 수 있기에 그들이 우리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미래 유령들과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삶은 갖고 있지 못하지만 우리의 선임들처럼 삶을 잃어서가 아니라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우리의 창작이 미래의 그들 작품에서 자양분을 얻고 있기에 그들에게 우리는 부모에게 의지한느 아이와 같은 입장이다. 
    하지만 역으로 그들 역시 살기 위해 우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앞으로 올 그들 작품에 대해 우리가 예감하는 것 덕에, 그리고 우리가 그것의 가능성을 우리 내면에 받아들이기 시작한 방식 덕에 그들은 언젠가 존재를 향해 길을 터나가고 제대로 인정받으리라고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미래의 존재들과 살아 있는 자들 사이에 실존하는 것과 창조되지 않은 것을 잇는 흐릿한 대화가 형성된다. 이 대화는 문학창작의 중심에 있고, 언어가 잠재적으로 품고 있는 것을 향한 문학의 모색 속에 있지만, 대화의 책임을 떠맡은 미래 작가들과의 소통의 창출을 통해서만 제대로 생겨날 수 있다. 133

    따라서 우리가 참으로 엄밀하고 싶다면 이번을 마지막으로 사건적 역사와 문학적 역사를 구분하고, 작가와 예술가들이 실제로 이중의 연대기에 속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창작자들은 그들이 속한 시대의 시민이면서 또한 다른 시간에, 고유의 리듬을 따르는 문학 또는 예술의 시간에 속한다. 141

    확신을 갖고 미래의 작가들을 식별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들의 작품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작품들이 우리가 접촉하는 작품들에 남기는 은밀한 흔적을 통해 이해받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천문학에서 블랙홀도 마찬가지다. 블랙홀에 대해 과학자들은 그것을 직접 파악할 수 없고 육안으로나 지각기구로도 볼 수 없지만 그것이 행성 주변과 자리한 물체에 초래하는 결과들을 통해 엄밀한 방식으로 간파되도록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들에 그 존재의 흔적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 문학에 희미한 빛줄기를 비추는 미래의 작가들과 작품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이 에세이의 가설이다. 그 빛줄기를 지각하면 우리는 충분히 주의 깊에 텍스트를 탐색함으로써 우리가 지향해 가는 새로운 미학적 영역을 추측하게 된다. 작품들은 이미 그것을 예고하는 흔적을 품고 있다. 
    텍스트들에 다르게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움으로써, 그리고 텍스트들이 일직선으로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가는 유일한 선형적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층의 시간이 서로 만나고 얽히는 이중적인 연대기의 움직임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상기함으로써 미래의 흔적에 우리는 민감해져야 한다. 
    흔적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문학적 사건들에서 전조 신호들을 포착하는 창작자들의 특별한 능력을 통해 작품 속에서 단지 과거에 의해 결정된 것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제공되어 있는 모든 것에 좀 더 민감해지도록 독서 행위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192



    이 새로운 문학 교육에서 미래 유령 개념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과거의 영향에 관심을 덜 기울이고 미래의 영향을 연구하게 되면 아직 존재하지는 않지만 현재와 과거의 문학에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유들과 작가들이 필연적으로 부각된다. 
    한 권의 책이 말을 거는 행복한 소수가 될 이 특혜 받은 수신인들을 언급하면서 스탕달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동시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높이 평가할 줄 아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 그렇게 그는 한 작가가 다른 시대들과 더불어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자기 시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될 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암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탕달이 환기한 이 소수는 미래의 사려 깊은 독자들만이 아니라, 미래의 작가들이기도 하다. 모든 글이 한 계보 내에 자리 잡고서 또 다른 작가들이 언젠가 와서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며 그들 역시 계승자들을 꿈꿀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가설의 이름으로 암시하는 미래의 작가들 말이다. 
    아직 불확실한 상태인 이 다른 존재들과의 대화는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 그들이 과거의 유령만큼 즉각적이고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들과 여러 형태의 소통을 시도하는 일을 좌절시켜서는 안된다. 있을 법 하지 않은 그들의 지위와 그들이 언젠가 갖게 될 지식을 동시에 존중하는 소통 말이다. 
    이 다른 존재들은 과거의 작가들과 똑같은 힘과 똑같은 자격으로 텍스트들에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텍스트들을 있게 만든다. 우리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지어낼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도 영감을 받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어낼 수 있는 것에 대한 글은, 최상의 순간에 쓰일 때, 우리가 꼭 깨닫지 못하더라도 일어날 일의 형상을 그리려고 애쓴다. 



    따라서 미래의 영향에 대한 고려는 단지 교육과 연구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미래의 작가들에게 과거의 작가들을 도우러 오도록 부추김으로써 글쓰기 작업에도 결과를 미칠 것이다.
    위대한 작가들이 미래의 동료들의 얼굴부터 그리려고 시작하면서 그들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우리가 그것을 듣게 될 때 그 호소에 응답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미래 유령들이 되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지지를 그들에게 가져다주지 않기란 어렵다. 
    어떻게 하면 과거의 작가에게 영감을 준 사람이 될까? 보기와는 달리 그 방법은 단순히 그 작가의 뒤를 계승하는 방법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그 작가가 올 것을 예감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따라서 그가 탐험하려고 애쓴 것에 뒤늦게 일관성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정당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일관성에 대해서는 그 작가가 시간 속에 살고 있으면서 그것을 지각하기를 바랄 수 있다. 
    한 작가로부터 영감을 받는 자는 그의 작품을 연장하는 데 그치는 반면, 미래 유령을 구현하려고 시도하는 자는 자기보다 앞선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의, 주저하는 듯하면서도 혁신적인 행보에 전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보다 숭고한 역할을 한다. 그는 과거의 작가가 짐작만 했던 것에 형태를 부여하도록 돕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과거의 작가와 기이한 관계를 맺게 된다. 제각기 상대를 만들어내면서 상대에 의해 만들어지는 관계인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작가들과 더불어 미래 유령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그들이 덜 혼자라고 느끼도록 돕는 것이다. 그들의 작품을 주의 깊게 읽음으로써 몇 년 또는 몇 세기를 가로질러, 그들이 고독과 기다림 가운데 살고 있는 곳에서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고서 계속해서 글을 쓸 힘을 찾게 해줄 강한 메시지를 그들에게 보냄으로써 말이다.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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