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들

그들의 고독은 절대적이었다.

스팍스는 알 수 없는 도시였다. 어떤 때는 아무도 이 도시에 뿌리내리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대분은 열리는 법이 없었다. 거리에는 이따금 사람들이 있었다. 저녁이면 몰려든 군중이 헤디 사케르 가의 아케이드 아래 마브룩 호텔, 데투르 선전 기관, 힐랄 극장, 델리스 제과점 앞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파도처럼 몰려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공공장소에는 사람들이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나머지 주변, 항구와 성곽을 따라 조금만 벗어나면 쓸쓸하고 죽은 도시였다. 앉은뱅이 야자수가 둘러선 누추한 성당 앞으로 모래가 쌓인 커다란 광장이 휑했다. 픽빌 가를 따라 공터와 이층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적막하고 침침하며 볼 것 하나 없이 직선으로 뻗은 망골테 가와 페자니 가, 압델카데르즈갈 가로 모래가 쓸려왔다. 잘 자라지 못한 야자수가 바람에 흔들렸다. 껍질이 부풀어 오른 종려나무 가지에서 부채같은 잎이 겨우 몇 개 달려 있었다. 고양이 한 떼가 쓰레기통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이따금 누렁이 한 마리가 다리 사이에 꼬리를 감추고 벽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무도 없었다. 늘 굳게 닫힌 문 뒤로 장식 없는 복도와 돌계단, 막힌 안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직으로 교차하는 길들, 철제 셔터, 산울타리, 막다른 광장, 막다른 골목,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대로의 세계. 그들은 말없이 방향을 잃고 걸었다. 이따금 모든 것이 환영에 불과하며, 스팍스는 존재하지도 숨쉬지도 않는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주변에 공모의 신호를 찾아 헤맸다. 아무것도 응답하지 않았다. 거의 고통에 가까운 고립감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을 박탈당했다. 세상에 몸담고 있지 않았다. 세상에 속하지도 않고, 앞으로도 속하지 못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그리고 영원히 계속될 엄격한 규율이 그들을 배척하는 듯했다. 어디든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그들은 영원히 낯선 사람, 이방인으로 남으리라. 항구의 이탈리아인, 몰타인,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지나가는 모습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리라. 금테 안경에 온통 하얗게 차려입은 올리브 농장주가 경호원을 대동하고 베이 가를 느리게 걸어갈 때도, 그들 곁을 지나며 눈길도 주지 않으리라

실비는 동료등과 형식적인 관계였고, 대개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프랑스인 정교사들은 계약직 임시 교수랄 전적으로 신임하는 것 같지 않았다. 차별 대우를 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실비가 자신들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그들은 실비가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몸가짐이 바르며 위엄있는 지방의 착실한 프티 부르주아 여교사 이미지에 걸맞기를 원했다. 그들이 프랑스를 대표하고 있었다. 소위 두 종류의 프랑스가 존재하고 있었다. 새내기 교사로서 가능한 한 빨리 앙굴렘이나 베지르, 타르브에 작은 집을 마련하고자 애쓰는 축, 또 다른 쪽은 반항하고 저항하는 축으로서 제3세계 식민지 문제는 건드리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다른이들을 경멸할 태세를 갖춘 이들이었다.(하지만 이런 부류는 사라져가고 있었다. 대부분 사면을 받았고, 그 나머지는 알제리나 기니로 정착을 위해 떠났다.) 이 두 부류 중 어느 쪽도 영화관 앞자리의 원주민 아이들 옆에 앉거나, 백수건달처럼 수염이 덥수록한 채, 헌 신발을 질질 끌며 엉망인 옷차림으로 길거리를 어슬렁대는 것은 못 봐줄 듯했다. 책이나 음반을 서로 빌리고 레장스 카페에 앉아 어쩌다 한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정감 어린 초대나 생기 있는 우정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런 것은 스팍스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아니었다. 사람들은 살기에 너무 큰 집에 들어앉아 자신들에 파묻혀 움츠리고 지냈다.

다른 사람들, 스팍스-가프 회사, 정유사의 프랑스인 직원들이나 이슬람교도, 유대인,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들과의 관계는 더 끔찍했다. 교류는 불가능했다. 일주일 내내 누구와도 말하지 않기도 했다.

얼마 안 가 삶 전체가 그들 안에서 멈춰버릴 것 같았다. 시간은 동요 없이 흘렀다. 더 이상 어느 것도 그들을 이 세계에 붙잡아 두지 못했다. 때늦게 들어오는 신문들이 선의의 거짓말이거나 혹은 이전 삶의 추억, 다른 세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그들은 스팍스에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 것이다. 더 이상의 계획, 더 이상의 조바심도 없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늘 멀기만 한 휴가나 프랑스로 돌아가는 일조차 꿈꾸지 않았다.

기쁨도 슬픔도 심지어 권태도 느끼지 않았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것인지, 과연 실제로 살고 있는 것인지 자문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 실망스러운 질문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만족도 얻지 못했지만, 이따금 혼란스럽고 모호하게나마 이곳에서의 삶이 분수에 맞고, 심지어 역설적이게도 이런 삶이 그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들은 무의 한가운데, 직선으로 난 길과 누런 모래, 석호, 잿빛 야자수로 된 무인도에,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을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전까지 한 번도 다른 경치나 기후, 다른 삶의 방식에 자신들을 맞추고 변화시키기 위해 준비를 해본 적이 없었다. 단 한순간도 실비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교사상에 걸맞은 적이 없었다. 거리를 배회하는 제롬은 그의 영국제 신발 밑창에 조국, 동네, 아지트, 활동 무대를 끌고 다닌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들이 주거지로 고른 라르비 자루크 가에는 카트르파주 가의 자랑거리인 모스케조차 없었다. 스팍스의 나머지 거리에는, 그들이 그토록 상상하기 위해 애를 썼음에도, 맥-마흔이나 해리스 바, 발자르, 콩트레스카츠프, 살플레옐, 6월 어느 날 밤의 센 강변은 없었다. 대신 무(無)만이 감돌았다. 하지만, 정확히 이 전무함 때문에, 다시 말해 모든 것이 부재하는 완전한 진공 상태로서의 중성의 장소, 백지상태 때문에 자신들이 정화되고 위대한 단순함과 진정한 겸손을 되찾은 것 같았다. 분명히, 튀니지 전체의 빈곤을 생각하면, 샤워와 자동차, 시원한 음료수에 길든 문명인이 느끼는 자잘한 불편쯤이야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비는 수업을 하며 학생들에게 질문하고, 숙제를 고쳤다. 제롬은 시립 도서관에 가서 손에 잡히는 대로 보르헤스나 트루아야, 제라파의 책을 읽었다. 그들은 작은 식당에 가서 거의 매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했다. 참치 샐러드, 빵가루 씌워 튀긴 에스칼로프, 꼬치구이, 노르스름하게 구운 생선, 과일을 먹었다. 레장스 카페에 가서 시원한 물이 딸려 나오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신문 한 뭉치를 읽고 영화를 보고 거리를 쏘다녔다.

그들의 삶은 마치 고요한 권태처럼 아주 길어진 습관 같았다. 아무 것도 없지 않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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