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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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안더스는 자신이 낙원에서 탄생했고, 짐플리찌우스 몰래 항상 그의 곁에 있었으며, 짐플리찌우스가 자신의 원래 모습을 되찾을 때에야 비로소 그를 떠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발트안더스는 짐플리찌우스의 눈앞에서 서기로 변하여 다음 글을 쓴다. 이어서 그는 거대한 떡갈나무, 암퇘지, 구이용 쏘시지, 농부의 대변, 토끼풀 밭, 하얀 꽃, 뽕나무, 비단 양탄자 등으로 변한다. 끝없이 먹고 먹히는 이런 과정과 마찬가지로 토머스 브라운은 어떤 것도 영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새롭게 생겨나는 형태에는 이미 파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개인과 공동체, 나아가 전세계의 역사는 갈수록 확장되면서 멋지게 비상하는 곡선을 그리는 게 아니라, 자오선에 도달한 뒤 암흑으로 하강하는 궤도를 따른다. 모호함 속으로의 사라짐을 파고든 브라운의 학문은 종말의 날에 모든 변혁이 완성되면 마치 극장에서처럼 모든 배우들이 다시 한번 무대에 나타나서 이 위대한 극작품의 파국을 완성하고 완결한다는 믿음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몸속에서 병이 자라고 날뛰는 것을 관찰하는 의사는 만발하는 생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더 잘 파악한다. 브라운에게는 우리가 단 하루라도 존속하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는 스러지는 시간의 아편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쓴다. 겨울의 해는 빛이 얼마나 신속하게 재 속에서 사라지는지, 밤이 얼마나 재빨리 우리를 에워싸는지 보여준다. 한 시간, 한 시간이 계산서에 더해진다. 시간조차도 늙는단. 피라미드, 개선문, 오벨리스크 따위는 녹아내리는 얼음으로 만든 탑에 불과하다. 천공의 형상들 속에서 한자리를 차지한 것들조차도 영원히 영예를 누릴 수는 없다. 니므롯은 오리온 별자리 속에서 사라졌으며, 우씨리스는 씨리우스별 속에서 사라졌다. 위대한 종족보다 더 오래 산 떡갈나무는 세 그루도 못된다. 어떤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았다고 해도 기억될 권리를 확보했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최상의 인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누가 알겠는가. 양귀비 씨앗은 어디서나 꽃을 피우지만, 어느 여름날 느닷없이 비참함이 눈처럼 우리 위로 내려오면 우리는 이제 잊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브라운의 머릿속을 맴도는 이런 생각들은 1658년 유골단지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책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 책은 당시에 노퍽의 순례지 월씽엄 근처의 들판에서 발견된 유골단지를 논한다. 그는 여기서 친지가 마지막 여행을 떠날 때 우리가 취하는 조치들에 대해 온갖 역사적, 자연사적 자료들을 인용하면서 상세하게 서술한다. 우선 두루미와 코끼리의 무덤들, 개미가 매장되는 작은 방, 벌집에서 나와 죽은 동료를 위해 장례행렬을 이루는 벌들의 습관에 대해 적고 나서 그는 여러 종족들의 매장의례를 서술하고, 이윽고 죄지은 육신 전체를 매장함으로써 화장 풍습을 최종적으로 종식시킨 기독교에 대해 말한다. 

2
운동이 처음 시작될 때는 그토록 가까이 있는 것만 같던 지상낙원의 희망도 버린 지 오래였다. 굶주림과 환각제로 감각이 남김없이 망가진 상태로 그들은 종말로 다가갔다. 6월 30일, 천왕이 목숨을 끊었다. 그에 대한 충성심에서였든, 아니면 정복자들의 복수가 두려워서였든, 수십만 명의 추종자들이 그의 모범을 따랐다. 장검과 단도, 불과 밧줄을 사용하거나 옥상이나 지붕에서 몸을 던지는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들은 자신을 절멸시켰다. 산 채로 구덩이에 뛰어들어 스스로를 묻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태평군의 자기파괴는 역사에서 유례가 없다. 6월 19일 아침, 적들이 도시로 몰려들어왔을 때, 그들은 살아 있는 목숨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고, 사방에서 파리들이 윙윙대는 소리만 가득했다. 뻬이징으로 보내진 보고에 따르면 태평천국의 왕은 어느 하수구에서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쓰러져 있었는데, 그거 언제나 입고 다니던, 무엄하게도 황제의 색인 노란 색으로 짓고 용의 그림으로 장식한 비단 옷만이 부풀어 올라 너덜너덜해진 그의 시신을 겨우 붙들어 매고 있었다. 

당시 중국에 주둔하던 영국군이 황제군과의 전투를 끝내고 황제군에 협력하지 않았더라면 중국 정부는 아마도 태평군의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장한 영국 국가권력이 중국에 주둔한 것은ㅇ 1840년부터였는데, 그 해에 이른바 아편전쟁이 선언되었던 것이다. 1837년부터 중국 정부가 아편 거래를 저지하기 위해 실시한 조치들로 동인도회사는 가장 큰 벌이가 되는 사업 중 하나가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동인도회사는 벵골 지방의 들판에서 양귀비를 재배하여 그 씨앗에서 얻은 마약을 주로 꽝저우, 샤먼, 샹하이 등지로 운송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행해진 영국의 선전포고는 이백년 동안 오랑캐의 침입을 막고 나라를 폐쇄해온 중국 제국이 강제적으로 개국되는 과정의 시작을 의미했다.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그리고 문명이 발전하기 위한 기본전제로 간주된 자유무역의 이름으로 서방은 유럽 대포의 우월성을 과시했고, 일련의 도시들을 점령했으며, 강화조약을 강요했는데, 이 조약에는 영국 상관의 해안에서의 영업보장과 홍콩의 이양, 그리고 특히 어마어마한 배상금 지급 등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처음부터 잠정적 조치에 불과했던 이 조약에는 내륙의 상업 중심지로 접근하는 데 대한 조항이 없었으므로 영국은 장기적 관점에서 다시 군사행동을 취해야 할 필요성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특히 랭커셔의 방적공간에서 생산한 면제품의 구매자가 될 수 있는 사억이라는 중국인의 수를 고려할 때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1856년에야 비로소 징벌적인 출정에 다시 나설 충분한 구실이 생겼다. 꽝저우 항구에서 중국 관헌이 중국인들로만 구성된 선원들 가운데 몇명의 해적 용의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화물선 한 척을 무력으로 점취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 분견대는 주돛대에서 펄럭이는 영국 국기를 떼어냈는데, 이는 당시 영국 국기가 흔히 불법거래를 위한 위

3
오포드에서 머무른 뒤 나는 이스턴 카운티스 옴니버스 회사의 빨간 버스를 타고 우드브리지를 거쳐 내륙 쪽으로 욕스포드까지 갔고, 거기서부터는 걸어서 북서쪽 방향으로 난 과거의 로마 길을 따라 지방 소도시 할스턴 아래쪽으로 펼쳐진,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거의 네 시간을 걸었지만 내가 본 것이라고는 대부분 추수가 끝난,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전답들과 낮게 깔린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과 일이 마일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대개 작은 무리를 지은 나무들로 둘러싸인 농가들이 전부였다. 끝없이 직선으로 뻗어나간 길을 걷는 동안 자동차라고는 한 대도 보지 못했고,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외로이 걷는 것이 즐거웠는지 고통스러웠는지 나 스스로도 모르겠다. 때로는 납처럼 무겁고 때로는 새털처럼 가벼운 시간으로 기억되는 그날, 구름이 가끔 약간씩 틈을 벌리기도 했다. 그러면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진 햇살이 땅 위로 내려앉았고, 우리 위의 어떤 존재의 다스림을 상징하는 과거의 종교 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대지의 이런저런 구석들이 밝게 빛났다. 오후에 나는 캐롤 그리드라 불리는 시설을 건나 로마 길에서 벗어나 목초지를 가로지른 후에 어둑한 해자로 에워싸인 모우트 팜에 이르는 도로로 접어들었는데, 그곳은 알렉 제럴드가 거의 이십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의 모델을 만들고 있는 곳이었다. 육십대 초반으로 짐작되는 알렉 제럴드는 평생 동안 시골에서 일했는데, 마을학교에서 퇴직하자마자 모형 만들기에 빠져 여느 모형제작자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긴 겨울 저녁에 온갖 종류의 보트와 범선, 커티삭호와 매리 로즈호 같은 유명한 배들을 작은 나뭇조각들을 이어붙여 만들었다. 오래지 않아 이 일에 뜨거운 열정을 느끼게 된데다 감리교회의 아마추어 설교자로서 이미 오래전부터 성서 역사의 사실적인 기초에 관심을 가졌던 터라 60년대 말 어느날 저녁, 그가 내게 직접 말해준 바에 따르면 가축들의 잠자리를 준비하던 중에 예루살렘 성전을 서기가 시작되던 시점의 모습 그대로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모우트 팜은 조용하고 약간 침침한 집이다. 그곳을 방문할 때마다, 도로에서 벗어나 해자 위의 작은 다리를 건너 현관문으로 다가갈 때마다 나는 어디에서도 사람을 보지 못했다. 문에 달린 놋쇠 고리를 두드려봤자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앞마당의 칠레산 남양삼나무는 꼼짝않고 서 있다. 해자에 있는 오리들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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