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짓과 정동



누군가가 나의 팔을 때렸을 때 나는 팔을 들어 고통에 반응할 수 있다. 반응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번째는 팔을 통해 고통이 표출되도록 두는 것이고 두번째는 내가 팔을 들어 고통을 표명하는 것이다. 이 두번째의 표명이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몸짓이다. 그러나 여기서 몸짓은 만족할 만한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 움직임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 만족할 만한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히 해석되지 않는 잔여가 반드시 그 움직임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짓은 기분을 정동으로 변환시킨다. "기분은 다양한 몸의 움직임을 통해 외부로 나타날 수 있고, 그렇게 나타나기 때문에 정동이라고 불리는 몸짓의 작용을 통해서 표출되고 표명된다". 정동은 몸짓을 통한 기분의 상징적 나타냄이다. 다시 말해 정동은 "상징적 나타냄"이다. 기분은 "이성적이지 않은 어떤 것"이다. 정동은 기분을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몸짓을 이성적이지 않은 어떤 것으로 해석할 때 우리는 정동을 마주한다. 이는 예술 경험에 대한 설명이고 따라서 정동이 미학적인 문제에 속한다. 기분은 징후들 속에서 드러나고 내적인 관찰에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윤리의 세계에 있다. 반면 정동은 미학의 세계에 있다.

정동은 '자연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코드화된 움직임이다. 누군가가 내 팔을 때렸을 때 내가 자연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잔여가 없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몸짓조차 되지 않는다. 여기서 고통을 과장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고통은 어쨌든 실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통의 표명, 타인을 향한 고통의 상징적 표출이다. 나타난 고통의 존재 또는 부재가 아니가, 바로 이 상징적 측면이 이 몸짓을 인위적인 기분으로 만든다. 정동의 이런 기만적이고, 나타내는, 상징적인 성격, 이 '인위성'이 기분들에 그리고 그럼으로써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정동은 기분을 상징적인 몸짓으로 형식화함으로써 정신화한다."

따라서 어떤 몸짓이 진실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할 때는 미학적인 저울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진실하다는 것에는 인식론적으로 실제적인 것, 자신과의 신의를 지키는 것 모두 포함되어 있지만 미학적인 관점에서 진실한 것은 자기가 사용하는 도구에 신의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의 반대말은 키치이다. 

그러나 취향에는 다툴 것이 없다는 말은 몸짓의 정동을 관찰하고 의미를 평가하는 데에 심각한 저해가 된다. 어떤 이는 키치적인 연기를 보고 진실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미학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식론적 혹은 윤리적 관점에서이다. 몸짓을 해석하는 이론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TV 드라마의 배우의 연기가 무엇보다도 진실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을 어떤 방법을 통해 반박하겠는가? 

정보 이론은 이 질문에 대한 불완전한 답을 제공한다. 정보 이론에 따르면 정보가 많을 수록 (정동을 담은 몸짓이 고귀하고 미묘할 수록) 몸짓은 난해해지고 소통은 잘 되지 않는다. 담고 있는 정보가 적을 수록 몸짓은 이해하기 쉬워지고 소통이 잘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몸짓은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정보 이론이 제시하는 이런 답은 키치를 평가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공식을 사용하는 방법의 과학성 때문에 미학적으로 진실된 정동을 평가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몸짓의 현상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세계에서 관찰할 수 있는 몸짓은 그 의미가 복잡하고 아름다운 것부터 공허하고 무의미한 몸짓까지 다양하다. 어떤 악수는 진실한 우정을 표현하지만 일상에서 우리가 나누는 악수는 후자의 범박한 몸짓이다. 어떤 몸짓이 아름다운 것인가? 어떤 몸짓이 오랫동안 기억할 만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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