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난 석면 피해 보상소송

하라 가즈오의 센난 석면 피해 보상 소송을 보며 계속 의문이 들었다. 왜 이 사람들은 국가에게 보상받아야 하는가? 환경은 원래 인간에게 적대적이고 나이가 들수록 건강은 악화되며 죽음은 당연한 수순이 아닌가. 원고들은 석면으로 인한 질병은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그로 인한 죽음은 일반적인 죽음이라고 볼 수 없다고 변호한다. 영화는 그 병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대해서 똑똑히 보여주지는 않는다. 내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믿어주는 것 그것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것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 것이 윤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 

환경부 장관과 정부를 향한 하라 가즈오의 태도와 시선은 노골적이다. 장관의 사과에 만족한다는 한 원고에게 던지는 하라 가즈오의 불만족 가득한 질문은 원고를 부담스럽게 할 뿐 아니라 관객 역시 하라 가즈오를 부담스럽게 여기게 만든다. 원고가 괜찮다면 당신이 괜찮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이 당사자인가? 그 사과만으로는 괜찮지 않다ㅡ라는 태도를 가지는 것 역시 당신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살기 위해 견뎌야 하고 눈감아야 한다. 

원고단의 공동 대표 중 한 사람인 노신사(석면 공장장의 손자로 죄책감 때문에 원고단의 공동 대표로 소송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역시 하라 가즈오와 가장 비슷한 쪽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소송에 대해 그 자신의 배경에 어울리는 지식인으로서의 견해를 갖는다. 원고들이 사과와 배상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은 정부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는 신중하게 단어를 고른다. 손으로 얼굴을 부비는 그에게서 피곤함이 느껴진다. 그의 피곤함 그의 견해 그의 지식 모두 교육받은 사람의 것이다. 그는 변호인단의 사법주의적 접근 방식에도 의문을 표한 바 있다. “사법 마피아”라는 단어를 거론한다. 

두 사람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미인. 직접 석면 일을 한 적은 없으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석면 일을 했고 어린 시절 그 공장에서 지냈다. 직접 노동자가 아니고 1972년 이후 석면에 노출되었으므로 모든 공판에서 피해 사실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간호사로 일했으나 석면폐병에 걸려 그만두었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굉장히 아름다워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등장하는 가장 첫 장면에서만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삶이 어떨 수 있었을까를 이야기하면서 운다. 그 이외의 장면에서 그는 좋은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쾌활한 시니컬함을 보인다. 장관의 사과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유일한 원고. 피해 사실을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해 (카메라 앞에서는) 별말하지 않음. 방송에서 읽어야 하는 입장문을 유순하게 썼다고 하며 쓰고 싶은 말을 쓴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깔깔 웃으며 검지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며 비밀이라고 말한다. 그는 다른 원고들과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데 그 활동을 하며 행복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때나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 사진을 찍을 때 그는 말한다. “스마트해 보이도록!”

다른 한 사람은 벽에 바싹 붙어 앉아 있다. 상반신 중에서도 가슴 윗쪽부터 머리까지가 카메라를 가득 채운다. 그가 기대고 있는 베개가 머리 위쪽으로도 올라와 있다. 얼굴은 일그러져 있다. 그는 소송에 참고한 원고단은 아니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는데 소송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내 아이들에게는 석면 일을 절대로 시키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방문심문에 증인으로 참여한다. “과거는 바꿀 수가 없습니다.” 하라 가즈오는 절망한 것이냐고 묻는다. 그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삶이 행복했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며 옆에 앉아 있는 그의 아내가 등장한다. 그의 아내는 남편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수발을 들고 있는 한 이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는 귀가 좋지 않아 아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듣지 못하지만 계속 웃고 있다. 카메라가 그를 타이트하게 클로즈업하고 있을 때와는 너무 다른 표정, 다른 얼굴이다. 갑자기 훤해 보이는 얼굴. 그는 젊은 시절 여기저기 낚시도 많이 다녔고 아내가 모르게 술집도 여럿 다닌 것 같다. 그 이후 그는 계속 웃는 낯으로 등장한다. 시니컬하지만 웃음이 많은 사람은 너무 쉽게 사랑할 수 있다. 

하라 가즈오의 카메라는 카메라를 든 이가 정확히 원하는 바대로ㅡ좌파 운동권의 관점으로ㅡ대상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지만 곧 뒤로 물러나와 대상의 다른 양상을 보여주며 대상에 대한 인상을 교체해 나간다. 삶은 결국 농담인가? 원고들이 나누는 농담과 따뜻함 속에 삶이 있는 걸까? 카메라는 편집하지 않지만 그 지점에서 만족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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