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을 결산하기


돌과 함께 2019년을 결산하는 질문들을 모았고 돌이 질문들을 정리하고 모아 표를 만들어주었다. 사실 이제 와서 한 해를 돌아보라면 여름 이후의 기억, 특히 8월 이후의 특정 기억들만 뚜렷하고 1, 2월의 겨울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당시 이직, 이사 등 큰일들을 많이 수행했던 때인데도 말이다. 포괄적인 결산을 위해 지금은 비공개로 돌려놓은 블로그 일기들을 훑어보고 왔다. 하반기에는 돌을 만나게 되었고 그것은 아주 큰 변화이지만 올해는 상반기부터 많은 일들이 있었고, 변화 이전에 단조롭게 유지해오던 것들도 있다. 그것들을 모두 종합해서 올해를 돌아보려고 한다.
1. 올해 시작해서 좋은 것
저축을 시작해서 좋다. 트위터에서만 알던 무무님을 만나 글쓰기모임을 시작해서 좋다. 전회사 편집자 선배들을 무척 좋아했는데 이직 후에 그들을 다시 끌어모아 독서모임을 시작해서 좋다. 링피트라는 게임을 알게 되고 주기적으로 하게 되어서 너무 좋다.
돌고래와 깊고 튼튼한 관계를 만들어가기로 약속하고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좋다.
2. 올해 그만두어서 좋은 것
미미한 급여를 주었던 전회사를 그만두어서 좋다. 보문동의 낡은 집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 좋다. 내 상황에 맞지 않게 부모에게 강요받던 금전적 요구를 거절하고 그들과 연락하지 않기로 한 것. 보증금을 다 갚아 더 이상 갚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3. 기대보다 좋았던 OO/ 실망이 컸던 OO
기대보다 좋았던 책은 어슐러 르 귄의 소설들(특히 어둠의 왼손), 집시계급의 컬트 포르노 탐정 소설의 클리셰와 장르적 우울, 박솔뫼의 고요함 동물.
좋았던 영화는 스파이더 맨 뉴 유니버스, 샌디 탄의 셔커스(넷플릭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어둠이 걷히고, 에릭 로메르의 보름달이 뜨는 밤, 임대형의 윤희에게 였다.
게임은 잘하지 않는데 단연 링피트를 올해 최고의 게임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돌이 겨울에 실내 운동으로 링피트를 같이 하자며 구매 사실을 알려왔을 때 나는 무척 시큰둥했었다...! 머지드래곤스라는 모바일 게임도 즐겨 했다.
실망이 컸던 책은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 이영준의 기계비평, 정지돈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스티브 실버만의 뉴로트라이브를 비롯해 과학책 모임에서 읽은 여러 책이다. 품질 좋게 저술되고 번역되고 편집되어 나온 과학책이 찾아보기 드물다는 것을 여과없이 느꼈다. 롤랑 바르트의 느끼함이 싫고, 기계비평의 필자-화자가 드러내는 남성됨에 거부감이 들었으며, 정지돈의 책은 그렇지 않아도 조금 과한 워크룸의 판형+디자인에다 내용까지 사이버네틱스에 관해서 웅얼거린다던지 하며 엉뚱한 곳으로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망한 영화는 지구 최후의 밤, 미드소마, 이미지 북. 지구 최후의 밤의 여러 무리수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부끄러움을 유발했다. 미드소마의 설정이나 연출들이 싫었고 이미지 북의 나레이션과 이미지를 나열하는 그 방식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4. 올해 쓴 글들의 제목
구 기울이기
사진의 안온함
흩어진 것들을 엮어 만들기
미술관 도서관
원룸
(+)올해 작업한 책들(참여한 책 포함)
자연의 패턴(과학)
정신현상학 강독1(철학)
지금 당장 당신의 sns를 삭제해야 할 10가지 이유(기술/사회학)
롤랑 바르트의 사진(미학/문학)
플랜 드로다운(과학/환경)
심장(과학/의학)
강한 인공지능과 인간(철학/과학기술학)
통념과 상식을 거스르는 과학사(과학사/과학)
5. 올해의 쓴 글 중 가장 좋은 것 / 가장 애증의 대상인 것
가장 좋은 것, 애증의 대상인 것 모두 ‘원룸’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만큼 글을 별로 쓰지 않았다. 원래도 많이 쓰는 편은 아니었으니 어쨌든 한 편이라도 완결을 지은 것에 대해 만족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올해 쓴 것들 중 원룸만큼 많은 시간과 힘을 들인 것은 없었다.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고 그들에게 결론부에 대해서 특히 이런저런 아쉬운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지만 그런 부분들까지 스스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만큼 당시 나의 답보된 상태까지 잘 담고 있는 것 같다. 지금으로서는 그것만으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의 안온함’은 돌고래와 사귀기 전, 그와 둘이서 이것저것을 읽고 글을 함께 쓰는 모임을 하고 있을 때 써서 공동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당시 유일한 모임원 돌고래는 그 글에 대해 무척 미적지근한 반응을 해서 그 글에 확신을 갖지 못하였는데 이후 글쓰기 모임을 함께하는 모임원들에게 읽어주었을 땐 그들이 좋아해주었고 나도 부끄러움을 조금 거두게 되었다.
6. 올해의 행복했던 일
검토부터 계약까지 온전히 내 의지로 진행한 책의 작업서 3권이 해외에서 도착했을 때 행복했다. 소설을 쓰면서 행복했던 것 같다. 판권에 이름이 들어가는 회사로 옮기게 되어서 좋다. 월급이 올라서 좋다. 돌고래의 집인 수족관에서 게임을 하거나 얘기를 하거나 잠을 자거나 동네에 식사를 하러 가거나 한 소탈한 기억들이 너무 행복하게 남아 있다.
7. 올해의 큰 병
우울증. 성향이 우울한 것과는 별개로 우울증이라는 병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올해 11월부터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고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당시 알 수 없는 이유들로 온 몸이 아프곤 했는데 그것 역시 우울증의 신체화 증상이 아니었나 짐작하게 된다. 지금 돌아보면 올해는 회사 생활을 길게 지속하면서 우울증의 위험에 여러번 노출되었던 것 같다. 올해 1-2월 전회사에 다니고 있을 당시에도 가족 문제, 경제적 어려움, 당시 살던 집에 대해 느끼던 공포심 등등 때문에 좋지 않은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이직이라는 큰 변화를 통해서 그것을 임시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었다. 이직을 하고 한동안은 정신없이 지낼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해소되지 않은 우울감이 다시 찾아온 것 같고 우울증이라는 결과에 이른 것 같다는 생각이다. 정신적으로 힘든 것도 괴로웠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던 몸의 증상들이 힘겨웠던 나날들이다.
8. 내가 나온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
12월 28일 라이팅룸 송년회. 무무 촬영.​

9. 내가 찍은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
늦가을의 광화문. 무무님이 선물해준 카메라2.​

10. 올해의 식당
1)츄이구이브레드
집에서 가까운 작은 빵집으로 버터를 샌드한 프레첼이 시그니처 메뉴다. 소규모로 운영되어 일주일에 4일밖에 문을 열지 않고 당일생산 당일판매를 원칙으로 하여 퇴근 후 찾아가면 빵이 없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여러 빵집 중 나의 입맛에 가장 맞는데다가 집에서 가깝기까지 한 완벽한 빵집이다. 내년 3월까지만 운영한다고 해서 아쉽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이곳에서 크리스마스 케익을 예약해 먹었는데 인절미생크림케이크라는 파격적인 메뉴였고 태어나서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특별한 케익이었던데다가 맛도 정말 훌륭했다. 오랫동안 기억할 만한 케익이었다.
2)찜마을
내가 정말 미워했고 나를 올해 너무 힘들게 만들었던 저자 선생이 출간 후 밥을 사준다고 해서 나갔을 때 얻어먹은 해물찜 집. 그 사람이 너무 밉고 싫었지만 해물찜이 눈물 나게 맛있어서 정말 배가 터질 때까지 먹었다. 이후 무무님과 한번 더 방문하였다.
3)선영이네 식사
선영이 집에 가서 두어번 식사를 얻어먹었다. 나베와 해물탕. 집이 아니면 먹기 힘든 진수성찬을 늘 얻어먹고 오게 되어서 너무 따뜻하고 좋은 기억이다.
4)파파존스
돌의 집앞에 있어서 포장 할인으로 자주 먹는 파파존스 피자. 맨 처음 먹었던 날이 유난히 기억 나는데 돌이 좋아하는 수퍼 파파스를 돌이 미리 사두었고 나는 우산을 들고 축축한 거리를 지나 돌의 집까지 걸어갔다. 왓챠로 스탈린이 죽었다!를 보면서 수퍼 파파스 패밀리 사이즈를 먹었다. 그때가 처음 파파존스 피자를 먹어본 것이었는데 먹어본 피자 중에 단연 최고였고 돌이 스탈린이 죽었다! 를 무척 깔깔대면서 봐주어서 좋았다.사귄지 얼마 안된 때라서 그렇게 크게 웃는 것을 처음 봤는데 피자를 먹으면서도 시원하게 잘 웃어서 좋았다.
5)에브리띵베이글
연희동에서 발견한 베이글집. 월넛+크림치즈 베이글의 맛이 생각난다. 돌고래와 함께 사들고 스타벅스에 앉아서 여러 번 먹었던. 피자 베이글도 정말 훌륭했다. 빵이 너무 쫀득쫀득하다.
6)연희동수제비
단골이고 앞으로도 계속 단골이 될 예정인 한산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수제비집. 사골수제비가 맛있다. 내 생일 날에도 이곳에 가서 더덕구이를 먹었다. 내과를 방문한 후 수제비를 먹었던 기억, 몸살이 난 몸을 이끌고 수제비를 먹고 땀을 뺀 후 갑자기 회복되었던 기억 등이 있는 애틋한 장소다.
11. 올해의 나들이
1)선유도공원
여름밤에 글쓰기모임원들과 선유도공원에 가서 서로 쓴 글들을 낭독하고 습지 옆을 거닐었다.
2)6월의 신촌
돌고래와 사귀기 전 만났던 6월의 어느 날. 저녁으로 텐동미세기에서 텐동을 먹고 엘피스의 창가 좌석에 앉아서 얘기를 나눴다. 그날의 분위기가 참 이상하고도 좋았는데 그때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3)국회도서관
돌고래와 함께 국회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도서관식당에서 밥도 먹고 한강변에 앉아 검은 물을 보며 무척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부르디외, 개념과 이론의 수입, 불온한 당신, 등등...
12. 올해 지키지 못한 계획
하반기에 소설 한 편을 쓰려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올해 초에 번역 연습을 하겠다는 계획도 세운 적이 있는 걸로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역시 하지 않았다.
13. 2020년의 다섯 가지 목표
1)소설 두 편 이상 쓰기
2)하고 싶은 일 몇 가지를 찾아서 가지고 있기
3)어학 공부를 시작하기(일어나 불어)
4)모임들과 관계들을 잘 유지하고 오래된 것들에서도 새로움을 발견하고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5)강의나 모임 등을 통해 새로운 동료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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